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태그 : 정우성
2009/10/11   호우시절 - 디지털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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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 디지털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한국 영화를 단 한 작품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남성이다보니 아무래도 멜로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멜로 장르에 있어서 드라마적인 완성도를 뽑아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 감독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허진호 감독이 그려나가는 사랑에는 영화적인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화적인 장치들을 앵글로 꽤나 멋지게 표현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감독이기도 한데, 이번 신작을 보니 이러한 감각이 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탄성을 지르게 하는 앵글과 색감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더군요. 단순히 아름다운 화면을 담아내고자 삽입한 것이 아닌, 스케치해나가는 풍경들에는 모두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정서적인 폭을 더욱 넓혀줍니다. 

흔히들 극장에서 봐야 하는 장르와 영화는 따로 있다고 말을 하고는 하던데, 거부할 수 없는 잔잔한 여운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런 장르의 작품 또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몰입과 더불어, 여러 관객들과 함께 보면서 느껴지는 정서적인 동질감 등이 작품의 여운을 더욱 확장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끝내는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에 포스터를 보고서 색감과 계절이 참 로맨틱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이 안겨주는 모든 감정들 희로애락 중에서,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의를 내린다면 참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계절과 색감의 활용은 영화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표현이 되고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면 젊었을 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계절로 표현하면 여름이 될 것 같고요. 또한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사계절 중 여름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이 작품의 배경으로 하나의 계절만 나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죠. 엔딩 씬에서 동하(정우성씨(1))가 메이(고원원씨)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 장면에서도 여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둘의 조우와 함께 다시 펼쳐질 그들의 미래가 과거와는 달리 해피엔딩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멜로 장르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을 스케치하는 것에도 능한 감독이지만, 내러티브를 살려내는 것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사랑'과 더불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항상 '죽음'이라는 것이 삽입되어 왔는데요. 이 작품 또한 죽음이 묘사되고 있더군요.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매개체와, 가장 슬퍼하게 될 매개체가 한 작품 안에 공존해있습니다.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그려나가는 재능이 없다면, 밀도 높게 드라마를 완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연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라마의 완성도가 못미치게 될 때, 내러티브가 실종됐을 때 사랑과 죽음은 결국 신파로만 흘러가니까요.
 
그는 이 두가지 소재를 마치 클래식을 들려주는 지휘자처럼 잘 조율하며 완성해냅니다. 그가 그려나가는 사랑에는 영화적인 거짓이 없듯이, 죽음 또한 영화적인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깊이 와닿는 것 같네요. 그의 작품에서 격정적인 정서는 느낄 수 없지만, 잔잔하게 밀려오는 그 거대한 여운은 영화 속에서 영화적인 거짓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죠. 영화를 찾는 관객의 정서를 가장 큰 폭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두가지, 사랑과 죽음을 함께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겠고요. 상영관을 찾을 때 마다 갈증을 느껴야만 했었던 멜로 장르에서의 포만감과 그 여운, 이런 것을 참 오랜만에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흑백 사진이 옛날을 회고하는 도구로 이용되고는 했었는데, 오프닝 씬을 보니 이제는 그것이 칼라 사진이라고 할지라도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네요. 동하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메이가 다시 공항으로 뛰어오게 만드는 옛 사진들은 핸드폰의 액정 화면으로 보게되는 디지털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처럼 아날로그 시절을 다루는듯한 - 그 둘이 서로에게 느꼈을 - 향수와, 그 둘 사이의 멀어져있었던 시간들의 간극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매우 대조적이지만 잘 표현하고 있더군요. 

옛 연인과 잃어버린 남편을 모두 자전거로 반추할 수 있게 되어버린 탓에 애써 자전거를 잊고 살아가는 그녀지만, 그런 그녀가 옛 연인의 선물에서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그 때 흘러나오는 음악(2)은 아름다운 화면과 더불어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조용히 흔들어대더군요. 메이의 그 얼굴, 메이의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습니다.

둘이 고즈넉한 길을 걷던 중, 대나무 숲으로 남 몰래 깊이 들어가 주변을 살피며 키스를 시도하는 모습에서는 저의 지난 날이 떠올라서 미소를 머금은 채 볼 수 있었고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혼재를 보여주며 그려나가는 세월의 간극, 그리고 옛 추억과 오늘날의 현실을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수줍게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잠시나마 지나간 호우시절을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1) 리뷰를 통해서 정우성씨 이야기도 해보려고 했었는데, 별도의 글로서 따로 다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씨는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좋은 배우입니다.

(2) 공식 홈페이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네요. 다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OST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음악까지 너무 좋더군요. 달콤하고 아름답습니다.
by 배트맨 | 2009/10/11 21:01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5) | 덧글(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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