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태그 : 이병헌
2009/10/22   나는 비와 함께 간다 (I Come with the Rain)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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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와 함께 간다 (I Come with the Rain)
대중 영화와 예술 영화의 조우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 중 하나입니다. 두 분야 모두 '영화'
라는 문화 예술의 범주 안에 속해있지만, '영화
'라는 단어에만 구속되어 있을 뿐 철학과 목적이 극명하게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보니 두 분야의 관객층 또한 좀처럼 조우하게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인위적으로 - 의도적으로 - 이 경계선을 지워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술성보다는 상업적인 논리 앞에서 색깔을 잃어버린 영화제가 화려하게 꾸며나가는 허상과 마케팅이 바로 그것입니다.

어떠한 영화를 선택하는 주체가 관객이므로 가해자는 정의하기가 쉽지 않지만 피해자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상영관으로 향하면서 관람 분위기가 조금 우려스러웠던 이유이기도 했고요. 아니나 다를까 상영 도중 나가는 커플도 있었고, 제가 앉은 좌석의 양쪽 커플들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한 채 쉴새없이 떠들더군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여기 저기서 비아냥 거리는 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올해 상영관에서 경험한 최악의 반응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글쎄요. 개막작으로는 매우 대중적인 작품을 내걸어서 관객들을 환호하게 했고, 바로 옆에서는 비대중적인 작품을 걸어놓은 채 화려한 레드 카펫을 통해서 관객들을 환호하게 합니다. 대중 영화와 예술 영화의 경계선을 지워버린 무대 앞에서 대중들이 열광하며 조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화 뿐만이 아니라 영화제에 대한 가치관과 시선 또한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부산국제영화제가 색깔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 이러한 조우는 앞으로도 해마다 계속 될 것 같습니다. 

부와 명예를 모두 움켜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배우이기는 하지만 결국 감독이 그려나가고자 하는 그림의 수단일 뿐이라는 점을 봤을 때,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어느 것을 지향해야 하나 하는 것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자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일부 영화인들, 관계자들이 원하는 지향점은 아니겠지만요.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타오(기무라 타쿠야)가 노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으로 묘사가 되고 있던데요. 무신론자인 저로서는 예수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가 아닌 하나의 신으로만 바라봤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주요 캐릭터인 클라인(조쉬 하트넷)과 수동포(이병헌씨)는 세속적인 인간이 될 테고요. 

클라인과 수동포의 내면은 그야말로 탄성이 나오게 할 정도로 깊이있게 잘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시타오인데 캐릭터의 정체성만 드러낼 뿐,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상징성과 개연성이 매끄럽지 못하더군요. 때문에 세 명의 캐릭터가 연계되어서 진행이 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캐릭터간의 연계성이 단절된 채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지는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 명의 중심축 중 한 명이 무너지니 내러티브가 제대로 지탱이 될리가 없습니다.

'고통과 구원'이라는 플롯 아래에서 시타오가 예수로 설정되었다면, 그 상징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보여줬어야 하지 않았나 싶더군요. 인간의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을 볼 때 마다,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예수가 아닌 - 신이 아닌 - 사이비 교주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트란 안 홍 감독도 그 점을 경계했는지, 나오지 말아야 했을 노골적인 예수의 모습을 차용한듯한 씬도 보였고요. 시타오를 그려나갈 때 마다 연출의 창의성과 표현력, 그리고 소통의 한계를 드러내더군요. 거기에 더해 실종된 후 예수가 되어버린 시타오에 대한 개연성까지 사라져서 극에 몰입을 하기가 매우 힘들었습니다. 

클라인과 수동포의 캐릭터는 이런 난해한 소재를 매우 잘 살려내고 있었기 때문에, 트란 안 홍 감독이 시타오의 표현에 대해서는 좀 더 깊은 고민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연출의 공백기를 가지며 그 오랜 시간동안 고민한 결과가 이런 것이였다면, 트란 안 홍의 한계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트란 안 홍 감독의 재능이 그나마 드러나는 것은 클라인과 수동포를 통해서였는데요. 신의 용서를 거부하고 욕망과 집착의 대상인 릴리(트란 누 엔 케)를 끌어안는 포옹 씬에서 드러나는 수동포의 피 묻은 손이 꽤 인상적이였습니다. 고통을 벗어나려면 세속적인 욕망과 집착을 버려야 할 텐데, 그럴 생각이 없으니 손에는 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계속 피를 묻힌 채 살아야 하겠죠. 그에게 달콤한 권력을 안겨주는 권총도 손에서 떠날 일이 없을 테고요.  

낮과 밤을 가리지 않은 채 자신을 계속 뒤쫓으며 괴롭혀왔던 경찰 멩지(여문락)와는 달리, 세속을 탐하며 피 묻은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을 용서해주겠다는 말을 생애 처음 듣고는 눈물까지 흘리게 되는 수동포였지만요. 신의 가슴에 총을 여러차례 쐈는데도 후련하지가 않습니다. 망치로 죽을 때까지 부하를 내리쳤을 때의 그 후련함이 느껴지지를 않는 겁니다. 생애 처음 들은 말과 더불어, 세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스스로 측은해지는 감정을 처음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들판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클라인 또한 수동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지만 수동포가 신 앞에서 내뱉은 말을, 그 또한 수동포 앞에서 똑같이 내뱉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가 본데, 나는 당신이 두렵지 않아."

여전히 세계 굴지의 제약회사 회장이 제시하는 돈 앞에서 손에 피를 묻히며 살아갈 뿐입니다. 결국에는 인과 관계가 얽혀있는 타인이 만들어낸 피를 묻히며 살아간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입니다. 신으로 그려지는 시타오가 절대적인 선이라면, 수동표는 절대적인 악이고, 클라인은 그 경계선에 걸터있는듯 보이지만요. 스스로 끊어낼 수도 있었던 인과 관계 안에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채 선택에 대한 댓가를 치루게 됩니다. 끔찍한 트라우마와 함께 그 또한 영원히 손에서 피를 씻어낼 수 없게되겠죠.

인간의 삶에서 스스로 선택하게 되는, 또는 인과를 인지하지 못하게 되어서 얻게 되는 고통은 인간 스스로 떨쳐버릴 수 없는 걸까요.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렇다고 말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그 많은 신들이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고요.
by 배트맨 | 2009/10/22 17:26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2) | 덧글(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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