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2012 - 디지털 (2012)
2억6천만$의 천문학적인 제작비와 더불어 157분이라는 엄청난 상영 시간이 전개되는 블럭버스터 작품이죠. 이런 기획은 할리우드에서만 가능한 것일 테고요. 그런데 '이런 초대형 프로젝트에 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이 선택된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미의 박스오피스에서만 1억$를 넘긴 연출작이 네 편이나 되지만, 오락성과 완성도에서 널뛰기 연출을 보여온 터라 개인적으로 신뢰하는 감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최근의 연출작 두 편만 봐도 그렇습니다. <투모로우>에서는 오락성을 즐기게 해주더니 <10.000 BC>에서는 반대로 깊은 한숨이 나오게 했으니까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이런 기복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였습니다. 하지만 스튜디오의 생각은 좀 달랐었던 것 같네요.

이른 바 장인이라고 인정받는 감독들은 이런 기획에 손사래를 치거나, 스튜디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요. 영화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락성을 보여준다는 전제, 또는 합의 하에 감독으로서는 완성도와 작품성까지 그려나가고 싶어할 텐데요.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삽입할 경우 자칫 관객들이 부담감을 느껴서 흥행에 실패하게 되는 경우를 스튜디오로서는 염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더군다나 자본이 무려 1억$ 단위로 투입이 되는 블럭버스터 기획에서는 더욱 더요. 

블럭버스터로 기획이 되어서 오락성과 완성도 그리고 작품성까지 세가지 요소를 모두 그려내며 흥행에도 크게 성공한 사례가 최근에 있기는 했었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가 그것인데, 문제라면 이런 경우가 정말 드물다는 것일 테고요. 

알맹이가 없는 영화라는 비판에 시달려오기도 했었지만 반대로 관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연출을 하는 감독, 그러면서도 흥행에 크게 성공을 한 경력이 있는 감독으로 롤랜드 에머리히 정도면 안성맞춤이라고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2억6천만$의 제작비라면 북미 외 시장에서도 흥행에 성공을 해야 제작비를 회수할 수 있을 테니까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월드와이드 성적표를 보면 <투모로우>로 5억$를, 그리고 <인디펜던스 데이>로는 8억$를 넘긴 바 있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 유심히 살펴본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때려 엎는 예고편이 아니라, 157분에 달하는 긴 상영 시간이였습니다. 제가 봐온 바로는 내러티브까지 작품 안에 펼쳐보일 수 있는 재능은 없는 감독인데, 그런 삽입을 시도해보려고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아 보이더군요. 북미와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를 모두 평정한 바 있는 그가 자신의 작품을 바라보는 저 같은 일부 시선에 서운함을 느낄 만도 했을 겁니다. 본인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한 번쯤은 보여주고 싶었을 테고요. 하지만 되지도 않는 것까지 욕심을 내서 그나마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 기대해볼 수 있는 - 요소인 오락성까지 축소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상 외로 오프닝부터 매우 빠르게 진행이 되더군요. 군더더기 없이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나아가는듯한 모습을 보며, 모처럼 오락성이 가득한 블럭버스터를 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리무진과 경비행기를 이용해서 아비규환이 되는 도심을 빠져나가는 시퀀스까지 그야말로 숨 돌릴 틈도 주지 않았으니까요. 상영관의 네 개면에 붙어있는 스피커를 휘돌아나가는 사운드가 청각을 즐겁게 했고, 큰 스크린으로 구현되는 퀄리티 높은 CG는 시각을 즐겁게 했습니다. 블럭버스터만이 안겨줄 수 있는 오락성과 규모에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숨 가쁘게 전개되며 백미가 펼쳐지던 중반부의 그 시퀀스가 오락성의 종착점이였네요. 배경이 국지적으로 설정되고, 연출의 중심이 캐릭터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후반부터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더불어 결말까지 재난 영화의 진부한 공식으로 그대로 흘러가고요.


절체절명의 재난 앞에서 해체된 가정의 회복되는 가족애를 다룬다거나, 초인처럼 고난을 극복해나가는 설정은 거의 모든 재난물에 사용이 되고 있는데요.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상영 시간이 꽤 길어서 이런 설정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드라마가 삽입되는 시도가 있지 않았을까 싶었는데, 드라마는 생략한 채 종반부에서 여지없이 이런 요소들을 다루고 있더군요. 전반적으로 깔아놓은 것이 없으니 여러 캐릭터들을 통해서 그려나가고자 하는 감정선이 관객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습니다. 이렇다보니 후반부에서는 지루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요. 

회복되는 가족애와 인류애 같은 메시지를, 거창한 철학을 종반부에서 그려나가고자 했으면 그에 걸맞는 최소한의 묘사와 전개가 전, 중반부에 있었어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군다나 상영 시간을 무려 157분이나 할애를 했으면 말입니다.

오락적인 묘미들을 전반부에 배치해놓고, 후반부에서 이런 배치를 한 것을 생각해보면 애시당초 그 또한 드라마를 통하여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살려나가는 것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 아니였을까 싶고요. 결국 완성도를 포기한 채 오락성으로만 연출의 포인트가 집중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족애와 인류애까지 그려나가기에는 그의 능력이 역부족이였네요. 이것이 전체적인 밸런스까지 무너지게 한 요인이 되고요.

당신의 작품에서는 메시지라던가, 철학 같은 것을 모두 들어내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완성도와는 담을 쌓고 있는 감독인 것을 잘 아니까요. 다음부터는 욕심부리지 말고, 가벼운 팝콘 영화로만 연출을 집중하세요. 2억6천만$의 제작비를 당신 손에 쥐어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다크 나이트>의 후속편이 당신에게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by 배트맨 | 2009/11/13 17:39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6) | 덧글(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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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All Right Reserved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출연 : 존 쿠색(잭슨 커티스 역), 아만다 피트(케이트 커티스 역), 치웨텔 에지오포(애드리안 헴슬리 역), 탠디 뉴튼(로라 윌슨 역), 올리버 플랫(칼 안휘저 역) 요약정보 : 어드벤처, 액션 | 미국, 캐나다 | 157 분 | 개봉 2009-11-12 | 제작/배급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배급),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more

Tracked from bada's style at 2009/12/26 00:59

제목 : 2012
2012 (2009)모험, SF, 스릴러, 액션, 드라마 | 미국, 캐나다 | 157 분 | 개봉 2009.11.12 출연존 쿠삭 John Cusack 잭슨 커티스 역아만다 피트 Amanda Peet 케이트 커티스 역치웨텔 에지오포 Chiwetel Ejiofor 애드리언 헬슬리 역탠디 뉴튼 Thandie Newton 로라 윌슨 역올리버 플랫 Oliver Platt 칼 앤휴저 역 감독 : 롤랜드 에머리히 Roland Emmerich -------......more

Commented by Uglycat at 2009/11/13 20:20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헐리우드 재난영화의 전형 그대로의 작품이었습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3 22:28
어차피 팝콘 영화니까 할리우드의 전형적인 재난물이라는 점에 비판을 크게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중반부 이후부터 연출의 중심이 캐릭터로 옮겨지며 배경이 좁아지니, 이 양반의 밑천이 그대로 드러나더군요. 그게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T.T
Commented by zaque at 2009/11/13 23:32
우연히 투머로우를 극장에서 보고 이런 감독도 있다는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그리 좋지 않은 의미로). 어린시절 63빌딩에서 본 어린이용 영화같다고나 할까. 여전하나 보군요, 적어도 제취향은 아닐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4 10:18
오락성에서 놓고 봤을 때 <투모로우>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연출작들 중에서 매우 잘 뽑아져나온 작품에 속합니다. 사실 <2012>를 보러 가기 전에 <투모로우> 만큼만 오락성을 보여줘도 괜찮겠다 싶었거든요. 그런데 이 양반.. T.T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이번 신작, zaque님께서 크게 실망하실 가능성이 농후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이 양반 여전하네요.
Commented by SPRINGstudio at 2009/11/14 00:08
보는 내내 손발이 오그라드네요 아이맥스처럼 파도가 몰려오는 장면에선 몇몇사람들이 손가락을 화면에 찔러대기도 했습니다.
쓰잘대기없는 부분은 다 빼고 그냥 초반부터 거의 달리기 시작합니다. 30분정도 지구가 어쩐다 등등나오고 내내 씨지인데 가족들이 다들 보러가도 재미있을듯해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4 10:23
SPRINGstudio님께서는 재미있게 보셨군요. ^^*

저도 만족스럽게 볼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텐데요. 개인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인 리무진과 경비행기로 탈출하는 시퀀스까지만 흥미로웠습니다.

그 이후부터 배경이 좁아지고 캐릭터로 중심이 옮겨가니 연출의 한계가 보이더라고요. 저는 그랬었습니다. 딴지는 아니고요. T.T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11/14 12:56
결국 오늘 이 영화를 보기로 했습니다. 일단 영상 외의 다른

부분에는 기대하지 않고 봐야겠군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6 21:30
지난 토요일에 관람하신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답글을 이제서야 드리네요. 소시민님께서는 재미있게 보시고 오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영화가 엉성한 거야 그렇다치더라도, 후반부터 오락성을 별로 못느끼겠더라고요.

날씨가 무척 추운데 옷 따듯하게 입으시고요. ^^;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11/17 09:21
배트맨님// 기대치를 낮추고 가서 그런지 나름 볼만했습니다.

지나치게 강한 운으로 위기를 해쳐나가는 진행을 보이긴 했지만

LA 붕괴신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조만간 제 얼음집에 감상 올리겠습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7 13:41
저도 LA 붕괴씬까지는 꽤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초반부터 거침없이 달리길래 롤랜드 에머리히 이 양반이 오랜만에 사고 한번 치나보다 했었네요. ^^*

그런데 후반부로 접어드니까 영화가 역시.. 내러티브를 좀처럼 풀어나가지 못하는 감독이라는 좌절감이 들었어요. 에머리히 감독의 연출작이라서 저도 특별히 기대를 하고 상영관으로 향한 것은 아니였었는데요.

따듯한 오후 맞으시고요..
Commented by 포케 at 2009/11/15 02:12
투모로우를 나름 재밌게 봐서 요번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제법 고조되어 있었는데 배트맨님 평을 보니 이거 걱정이 무럭무럭 자라나네요; ㅇ<-<
요즘 영화 티켓도 오르고 택시비도 오르고 없는 시간 쪼개서 갔다가 초난감한 영화를 만나면 전년대비 200% 우울해질텐데 말이죠.
기대반 걱정반으로 상영관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뭐, 딱히 볼만한 작품도 없고 말이예요.
날씨가 갑자기 쌀쌀해졌네요. 건강 유의하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 ^;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6 21:35
<투모로우>는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연출작들 중에서 오락성을 꽤 잘 살려낸 작품에 속합니다.

글쎄요. 포케님께서는 어떻게 보실지 모르겠지만, 이번 신작은 썩 잘 뽑아져 나온 것 같지 않네요. 중반부까지는 괜찮았는데 후반부터 배경이 좁아지고, 캐릭터 중심으로 이야기가 들어가니 여지없이 연출의 한계를 드러내더군요. T.T

저는 그랬었는데 포케님께서는 재미있게 보셨었기를 바래봅니다. 요 며칠 날씨가 여간 추워진 것이 아니네요. 감기 유의하시고 포근한 시간 맞으세요. ^^*
Commented by 이닥 at 2009/11/15 13:00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는 영화를 꾸준히 보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만으로 마이너스적인 요소인것 같아요 씨네21 읽어보니
기자들도 노골적으로 표현하더라구요.
인디펜던스 데이는 그 해 더락과 함께 초딩 시절 저를 헐리웃 키드로 만들었던 영화 였는데 두 감독들 요새 다 뭐 그렇네요 ㅋㅋ
전 에머리히가 나름 인디펜던스 데이를 통해 재난 영화의 새로운 공식을 만들었다고 봐요. 대신 이젠 그 공식에 그만 대입하고 새로운 공식을 만들었으면 좋겠어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6 21:44
저도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연출작들을 꾸준히 봐오고는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좀처럼 신뢰가 안 생기네요. 워낙 연출의 기복이 심한 양반이라서요.

말씀하신 <인디펜던스 데이>와 <더 락> 두 편 모두 저 또한 재미있게 봤었습니다. 두 감독들이 그 시절의 재능을 요즘에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니.. 뭐 이제는 그런가보다 하고 있습니다. 거의 포기 상태라고 해야 할까요. T.T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은 정말 모를 양반입니다. 연출에 이렇게 롤러코스터를 타는 감독이 또 있을까 싶네요. -_-a

날씨가 매서운데 포근한 한주 되세요. ^^;
Commented by BLUEnLIVE at 2009/11/15 20:18
"<다크 나이트>의 후속편이 당신에게 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이 문구를 읽는 순간 영화계의 재난이 업습해오는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에머리히는 실세계에선 재난의 장인...?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1/16 21:47
아마 롤랜드 에머리히처럼 박스오피스에서 돈다발을 쓸어모으면서도, 정작 관객들에게는 손가락질을 받는 감독도 드물 것 같습니다. 이번 작품도 별 기대를 안 하고 갔었는데 '에머리히 당신이 그러면 그렇지' 이런 생각 밖에 안 들더군요. T.T
Commented by bada at 2009/12/26 01:04
음...배트맨님의 영화평가를 보면 블럭버스터 팝콘무비에 좀 엄격한 편인거 같단 생각을 해봅니다. 뭐 이정도면 괜찮은 헐리웃 재난영화라고 봐도 될꺼같은데요...ㅎㅎ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2/26 16:05
bada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영화와 팝콘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저의 경우 대부분 동일하거든요.

나름대로 팝콘 영화의 경우 좀 더 관대한 시선으로 보려고는 하는데, 제 시선의 틀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않는 것이 사실이고요.

랙백이까지 놓고 가주셔서 고맙습니다. 맹추위가 다시 시작되었는데 따듯한 주말 맞으시고요. 항상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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