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호우시절 - 디지털
무덤까지 가져가고 싶은 한국 영화를 단 한 작품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됩니다.
제가 남성이다보니 아무래도 멜로 장르를 특별히 선호하는 편은 아닌데, 허진호 감독의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멜로 장르에 있어서 드라마적인 완성도를 뽑아내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감독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 감독 중 한명이기도 합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더불어 그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허진호 감독이 그려나가는 사랑에는 영화적인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화적인 장치들을 앵글로 꽤나 멋지게 표현해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감독이기도 한데, 이번 신작을 보니 이러한 감각이 만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때로는 탄성을 지르게 하는 앵글과 색감이 스크린에 가득 펼쳐지더군요. 단순히 아름다운 화면을 담아내고자 삽입한 것이 아닌, 스케치해나가는 풍경들에는 모두 의미가 부여되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정서적인 폭을 더욱 넓혀줍니다. 

흔히들 극장에서 봐야 하는 장르와 영화는 따로 있다고 말을 하고는 하던데, 거부할 수 없는 잔잔한 여운을 만끽하고 싶다면 이런 장르의 작품 또한 극장에서 관람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 것 같습니다. 영화에 대한 몰입과 더불어, 여러 관객들과 함께 보면서 느껴지는 정서적인 동질감 등이 작품의 여운을 더욱 확장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끝내는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처음에 포스터를 보고서 색감과 계절이 참 로맨틱하면서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랑'이 안겨주는 모든 감정들 희로애락 중에서, 그것이 아름답다고 정의를 내린다면 참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포스터에서 볼 수 있는 계절과 색감의 활용은 영화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표현이 되고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면 젊었을 때를 떠올리게 됩니다. 계절로 표현하면 여름이 될 것 같고요. 또한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사계절 중 여름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게 됩니다. 이 작품의 배경으로 하나의 계절만 나오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겠죠. 엔딩 씬에서 동하(정우성씨(1))가 메이(고원원씨)를 다시 기다리고 있는 장면에서도 여름이 펼쳐지고 있는 것은, 둘의 조우와 함께 다시 펼쳐질 그들의 미래가 과거와는 달리 해피엔딩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멜로 장르의 매력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을 스케치하는 것에도 능한 감독이지만, 내러티브를 살려내는 것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의 작품들에는 '사랑'과 더불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항상 '죽음'이라는 것이 삽입되어 왔는데요. 이 작품 또한 죽음이 묘사되고 있더군요. 삶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워야 할 매개체와, 가장 슬퍼하게 될 매개체가 한 작품 안에 공존해있습니다. 내러티브를 탄탄하게 그려나가는 재능이 없다면, 밀도 높게 드라마를 완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결코 선택할 수 없는 연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드라마의 완성도가 못미치게 될 때, 내러티브가 실종됐을 때 사랑과 죽음은 결국 신파로만 흘러가니까요.
 
그는 이 두가지 소재를 마치 클래식을 들려주는 지휘자처럼 잘 조율하며 완성해냅니다. 그가 그려나가는 사랑에는 영화적인 거짓이 없듯이, 죽음 또한 영화적인 거짓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가슴에 깊이 와닿는 것 같네요. 그의 작품에서 격정적인 정서는 느낄 수 없지만, 잔잔하게 밀려오는 그 거대한 여운은 영화 속에서 영화적인 거짓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겠죠. 영화를 찾는 관객의 정서를 가장 큰 폭으로 요동치게 만드는 두가지, 사랑과 죽음을 함께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겠고요. 상영관을 찾을 때 마다 갈증을 느껴야만 했었던 멜로 장르에서의 포만감과 그 여운, 이런 것을 참 오랜만에 느끼게 됩니다. 


예전에는 흑백 사진이 옛날을 회고하는 도구로 이용되고는 했었는데, 오프닝 씬을 보니 이제는 그것이 칼라 사진이라고 할지라도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훌륭한 도구가 되었네요. 동하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더불어서 말입니다. 메이가 다시 공항으로 뛰어오게 만드는 옛 사진들은 핸드폰의 액정 화면으로 보게되는 디지털 세상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이처럼 아날로그 시절을 다루는듯한 - 그 둘이 서로에게 느꼈을 - 향수와, 그 둘 사이의 멀어져있었던 시간들의 간극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매우 대조적이지만 잘 표현하고 있더군요. 

옛 연인과 잃어버린 남편을 모두 자전거로 반추할 수 있게 되어버린 탓에 애써 자전거를 잊고 살아가는 그녀지만, 그런 그녀가 옛 연인의 선물에서 마침내 그것을 극복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그 때 흘러나오는 음악(2)은 아름다운 화면과 더불어서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조용히 흔들어대더군요. 메이의 그 얼굴, 메이의 주체할 수 없는 그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왔습니다.

둘이 고즈넉한 길을 걷던 중, 대나무 숲으로 남 몰래 깊이 들어가 주변을 살피며 키스를 시도하는 모습에서는 저의 지난 날이 떠올라서 미소를 머금은 채 볼 수 있었고요. 아날로그와 디지털 시대의 혼재를 보여주며 그려나가는 세월의 간극, 그리고 옛 추억과 오늘날의 현실을 때로는 덤덤하게, 때로는 수줍게 그려나가는 모습을 보며 저 또한 잠시나마 지나간 호우시절을 떠 올릴 수 있었습니다.


(1) 리뷰를 통해서 정우성씨 이야기도 해보려고 했었는데, 별도의 글로서 따로 다뤄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상호씨는 볼 때 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 좋은 배우입니다.

(2) 공식 홈페이지에서 흘러나오고 있네요. 다시 들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OST를 구입하려고 합니다. 음악까지 너무 좋더군요. 달콤하고 아름답습니다.
by 배트맨 | 2009/10/11 21:01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5) | 덧글(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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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2009) 그 아름답고, 다웠던 한 때 이 작품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더니, 특별히 의도하지는 않았는데 허진호 감독의 장편들은 한 작품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타 장르에 비해 로맨스 영화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는 내 인생의 영화 중 한 작품일 정도로 좋아했던 작품이라 VHS테잎으로도 소장하고 있을 정도다. 이런 허진호 감독이기는 하지만 그의 전작들이 모두.....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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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씨네마 / 종보미디어 / 영화사 호 / 토러스필름&#13;&#10; 호우시절 [好雨時節] 감독 허진호 출연 정우성, 고원원, 김상호, 마소화 등 제작 판씨네마 / 종보미디어 / 영화사 호 / 토러스필름 2009. 한국. @ 롯데시네마 , , , 등의 허진호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멜로 영화에 있어 상당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허진호 감독 영화의 매력은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데 있지 않나 싶다. 일반.....more

Commented by 도리 at 2009/10/11 22:04
네, 이 영화의 OST... 백그라운드로 들려오는 음악도 너무 좋았고 말이죠. 정말 전체적으로 잘 꾸며놓은 연애이야기였다는... 마음 포근해지고 돌아왔답니다. T_T)b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1 23:05
모처럼 한국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는 시간이 꽤나 즐거웠습니다. 올라가는 스탭들 이름 확인하랴,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을 들으랴.. 스탭롤이 두 세번쯤 반복되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들더군요. ^^

잘 꾸며놓은 연애 이야기였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쌀쌀해지고 있는 가을에 마음이 포근해지는 그런 작품이였네요. OST에 꽂혀서 바로 구입하려고 합니다.

랙백이 콤보세트까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랙백이 타고 넘어갈께요. ^_^
Commented by 수룡 at 2009/10/11 22:12
볼까 -> 보지 말자, 이랬는데 꼭 봐야겠네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1 23:08
한국 멜로 영화의 전반적인 수준을 봤을 때, 외면해야 할 이유가 단 한가지도 없는 작품이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마음을 바꾸신 수룡님께도 만족스러운 영화가 되셨으면 좋겠네요.

음악도 꽤 좋습니다. 엔딩 크레딧 올라갈 때 다시 한번 음미해보세요. 저는 영화를 본 후 좌석에서 일어나기 싫었습니다. ^^;
Commented by 타누키 at 2009/10/12 09:11
남성이 메인,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 참 좋았습니다. ㅎㅎ
시도 궁금했는데 맨마지막에 넣어준 것도 센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2 10:05
그러고보니 허진호 감독의 작품들을 이끌어 나가는 중심 캐릭터는 항상 남성이였네요. 이번 작품 또한 그랬었고요. 그런 것과는 별개로 저도 이번 영화 참 좋았습니다. ^^;

엔딩 크레딧에 나오던 두보의 시도 예술이였어요. 스텝롤이 좀 천천히 올라가서 좀 더 음미를 할 수 있게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만족스러운 영화였습니다. (^^)=b
Commented by 미미씨 at 2009/10/13 22:32
이 영화 평이 대체적으로 좋은데요? 음..봐야겠네요. 사실은 좀 망설였는데 배트맨님 글 올라오면 보러가야지..이러고 있었어요. 하하하;;
사실, 뭘 하는지 요즘 바빠서 진짜 쓰러질 지경이에요. 백수가 왜 이러는건지..아구아구..ㅠㅠ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3 23:17
평은 대체적으로 좋은 작품인데, 상영관은 텅 텅 비어있더군요. 보실 생각이시면 좀 서두르셔야 하실 것 같습니다. 금주의 개봉될 라인업이 꽤 좋은 편이여서, 곧 교차 상영으로 바뀔 것 같네요.

개인마다 선호하는 장르와 취향, 그리고 영화를 해석하는 시선이 다르겠지만요. '막장 TV 드라마'들이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을 보면, 사실 이 작품에 대한 외면이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과연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뭘까요? 자극적인 설정을 깔아주고, 비현실적인 캐릭터들 그려주고, 판타지를 섞어주면 되는 걸까요? 통탄스럽습니다.

아마 허진호 감독이 은퇴를 하게 되면, 저 또한 더 이상 한국의 멜로물은 극장에서 찾지 않게 될 것 같습니다. 이만한 멜로물 연출을 완성해내는 국내 감독도 보지 못했고요.

미미씨님께도 좋은 작품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네요. (쉬엄 쉬엄 하세요. ^^)
Commented by 필그레이 at 2009/10/13 23:14
으아아...이 영화 사실 정우성때문에 안보려고 했는데 여기저기 괜찮다는 소문이 솔솔 들리네요.배트맨님도 그렇고.지구에서 사는 법 이 간판내려거기전에 봐줘야하나어쩌나 고민중입니다.ㅜㅠ

정말 오랜만에 왔네요.^^ 그간 잘 지내셨죠?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3 23:32
말씀하신 독립 영화에 대해서는 제가 특별히 드릴 수 있는 말씀이 없고요.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꽤 좋았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의 멜로 장르를 이렇게 꾸준히 잘 완성해내는 감독도 없으니까요. 선택하셔도 후회하시지는 않으실 거예요. ^^;

막장 TV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한심한 연출이 티코라면, 이 작품의 연출은 람보르기니 또는 페라리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래도 잊지않고 찾아주시니 참 고맙습니다. (정우성씨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 ^^*)
Commented by 태빈™ at 2009/10/14 08:43
아..저도 영화완전 재미있게보고..
크레딧 다 보고나왔다는..
참..긴 여운을 남기는 영화였습니다....
dvd 와 ost 모두 갖고싶다라는 생각이 드는영화였구요
음악이 너무 듣고싶어서 공식홈페이지에서 불펌 후
블로그에 포스팅해놨다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10/14 12:30
영화 속에 취하게 만들고, 엔딩 크레딧에도 흠뻑 취하게 하는 작품이였습니다. 상영관 좌석에 앉은 채 잔잔하지만 끊임없이 밀려드는 그 여운을 참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었고요. ^^*

저도 음악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누굴까?' 싶어서 유심히 봤네요. 여러가지로 꽤 만족스러웠었던 작품이였습니다.

좋은 영화 많이 보시고요. ^^
Commented by 파푸와 at 2009/10/25 23:39
오늘 보고 왔습니다.
어떻게 감상을 쓸까 고민했었는데.
좋은 감상글이 벌써 있었네요.^^
전체적으로 잔잔하게 너무 더하지도, 부족하지 않은 좋은 영화를 보게되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요즘 막장드라마가 많아서(액션인지, 스릴러인지도 구분이 안가는) TV 드라마는 잘 안보게 된지 오래입니다만.
이런 좋은 영화를 만난게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Commented by riskyrs at 2009/10/29 12:40
감상글을 읽다보면 가슴이 뻥 뚫리면서 시린 느낌이 드네요..
몸은 뜨거운데 가슴은 뜨거워 지는데 그걸 채울수 없는 아픈이 느껴지네요 가을이라 그런지 가을타는가 봅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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