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에 개봉을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극장가에서 상영을 하고 있더군요. 지난 겨울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작품이였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주저하지 않고 상영관으로 향했습니다.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 이 작품이 들어올린 셀 수 없이 많은 트로피 내역들이 자막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데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제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평단은 거의 만장일치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작품이라서, 이러한 수상 결과들은 충분히 예상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 하면 저는 1996년작 <트레인 스포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명보극장에서 관람을 했었는데, 정말 상영 시간 내내 박력과 유쾌함이 가득 느껴지며 커다란 임팩트를 안겨주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때부터 제 가슴속에 대니 보일 감독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 작품 이후 예상 외로 연출의 기복을 보여왔었죠.
지금도 저는 대니 보일 감독의 최고 작품은 <트레인 스포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신작을 보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대니 보일 감독이 자신의 연출 정체성을 다시 완벽하게 되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처럼 <트레인 스포팅>을 잊을 수 없는 팬이라면 이번 작품을 관람하면서 비슷한 생각들을 하셨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웰컴! 대니 보일!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고 영화의 제목이 보여지는 앵글부터 탄성이 나오게 하더군요. 창의적이며 화려한 기교가 가득 묻어있는 비주얼이 빠르고 박력있는 편집과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맞춰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메시지와 완성도였을 겁니다. 이 요소들에 대해서 평단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준 것 같은데요. 관객으로서 느낀 대니 보일이 완성시킨 퍼즐들에 대해서 느낌을 적어볼까 합니다.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읽지 마시길..

자말을 취조하던 이가 "남자는 돈과 여자 두가지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일이 종종 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상영 시간 내내 이와 연관되어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다른 삶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자말과 살림 형제입니다.
바로 눈 앞에서 무기력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만 봐야 했던 자말은 그로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또 다시 그의 눈 앞에 서있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연민을 느끼면서 그 여성만큼은 본인이 지켜주고자 다짐합니다. 트라우마 속에 시달리면서 두번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던 자말에게 퀴즈쇼에 대한 도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숙명이자 신념이였을 겁니다. 퀴즈쇼 진행자가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자말의 사회적인 신분을 조롱하며 방청객들과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에게 이런 체면 따위는 문제될 수 없습니다. 라띠까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평생동안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또한 지울 수가 없을테니까요. 평생을 이러한 자책감 속에서 살게 될 겁니다. 이 깊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매개체 또한 사랑이지만요.
하지만 자말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 성장기를 보내면서 잘못된 인성과 가치관을 갖게 된 살림은 슬럼가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총과 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은 욕정의 대상일 뿐이고요. 하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말의 신념과 가치관을 보면서 자신이 살며 쫓던 것들이 덧없이 부질없던 것임을 깨닫고, 가족과 신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욕조 위에 지폐를 뿌리면서 허탈한 웃음을 보이고 총을 마지막으로 움켜잡은 그가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순간, 여성은 욕정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고, 물욕이 아닌 사랑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짧은 찰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통속적인 플롯으로 진행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이 완성되는 이야기를 담는듯 하지만,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두 형제를 통해서 본 삶의 가치관과 사랑의 정의가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말과 라띠까가 재회하게 되는 엔딩씬 보다는, 살림의 최후가 더 정서적으로 다가왔었던 것 같고요.
아무리 세상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도 우리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지키며 나아가야 하는 신념과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이 부분을 들어내고 만약 로맨스만 부각시켰다고 하면,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로맨스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메시지가 뚜렷한 영화였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니였을까 싶네요.
끝으로 이 작품의 비주얼과 편집은 정말 감탄이 연거푸 나올 정도로 최고였습니다. 이처럼 기교를 이용하지 않고 진행을 했으면, 상당히 무거운 영화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네요. 대니 보일의 연출이 물 만난 고기처럼 보이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