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지난달 19일에 개봉을 했었는데 아직까지도 극장가에서 상영을 하고 있더군요. 지난 겨울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작품이였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주저하지 않고 상영관으로 향했습니다.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전, 이 작품이 들어올린 셀 수 없이 많은 트로피 내역들이 자막으로 스크린을 가득 채우던데요.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제가 열리기 전부터 이미 평단은 거의 만장일치로 열광적인 지지를 보낸 작품이라서, 이러한 수상 결과들은 충분히 예상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 하면 저는 1996년작 <트레인 스포팅>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당시 명보극장에서 관람을 했었는데, 정말 상영 시간 내내 박력과 유쾌함이 가득 느껴지며 커다란 임팩트를 안겨주었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그때부터 제 가슴속에 대니 보일 감독이 깊게 각인되어 있었지만, 그 작품 이후 예상 외로 연출의 기복을 보여왔었죠.

지금도 저는 대니 보일 감독의 최고 작품은 <트레인 스포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신작을 보고 상영관을 나서면서 대니 보일 감독이 자신의 연출 정체성을 다시 완벽하게 되찾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처럼 <트레인 스포팅>을 잊을 수 없는 팬이라면 이번 작품을 관람하면서 비슷한 생각들을 하셨을 거라고 보여집니다. 웰컴! 대니 보일!

오프닝 크레딧이 시작되고 영화의 제목이 보여지는 앵글부터 탄성이 나오게 하더군요. 창의적이며 화려한 기교가 가득 묻어있는 비주얼이 빠르고 박력있는 편집과 어우러지면서, 이 작품의 마지막 퍼즐을 끼워맞춰야 한다면 그것은 바로 메시지와 완성도였을 겁니다. 이 요소들에 대해서 평단들이 일제히 손을 들어준 것 같은데요. 관객으로서 느낀 대니 보일이 완성시킨 퍼즐들에 대해서 느낌을 적어볼까 합니다.

지금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읽지 마시길.. 


자말을 취조하던 이가 "남자는 돈과 여자 두가지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일이 종종 있다"라고 이야기 하는 대사가 나오는데, 상영 시간 내내 이와 연관되어 극명하게 대조시키면서 다른 삶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캐릭터가 자말과 살림 형제입니다.

바로 눈 앞에서 무기력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만 봐야 했던 자말은 그로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괴로워 하지만, 또 다시 그의 눈 앞에 서있는 여성을 만나게 되고 연민을 느끼면서 그 여성만큼은 본인이 지켜주고자 다짐합니다. 트라우마 속에 시달리면서 두번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았던 자말에게 퀴즈쇼에 대한 도전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숙명이자 신념이였을 겁니다. 퀴즈쇼 진행자가 전국에 생중계되는 방송에서 자말의 사회적인 신분을 조롱하며 방청객들과 웃음을 터뜨리지만 그에게 이런 체면 따위는 문제될 수 없습니다. 라띠까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평생동안 어머니에 대한 트라우마 또한 지울 수가 없을테니까요. 평생을 이러한 자책감 속에서 살게 될 겁니다. 이 깊은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매개체 또한 사랑이지만요.

하지만 자말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드는 극한 성장기를 보내면서 잘못된 인성과 가치관을 갖게 된 살림은 슬럼가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총과 돈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여성은 욕정의 대상일 뿐이고요. 하지만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자말의 신념과 가치관을 보면서 자신이 살며 쫓던 것들이 덧없이 부질없던 것임을 깨닫고, 가족과 신에게 속죄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욕조 위에 지폐를 뿌리면서 허탈한 웃음을 보이고 총을 마지막으로 움켜잡은 그가 '신은 위대하다'라고 외치는 순간, 여성은 욕정의 대상이 아닌 사랑의 대상이고, 물욕이 아닌 사랑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올바른 삶이라는 것을 짧은 찰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꼈을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통속적인 플롯으로 진행되면서 지고지순한 사랑이 완성되는 이야기를 담는듯 하지만, 감독이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두 형제를 통해서 본 삶의 가치관과 사랑의 정의가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자말과 라띠까가 재회하게 되는 엔딩씬 보다는, 살림의 최후가 더 정서적으로 다가왔었던 것 같고요.

아무리 세상 살아가는 것이 힘들어도 우리 사람들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고, 지키며 나아가야 하는 신념과 가치관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 이 부분을 들어내고 만약 로맨스만 부각시켰다고 하면,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까 싶습니다. 로맨스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는 메시지가 뚜렷한 영화였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니였을까 싶네요.

끝으로 이 작품의 비주얼과 편집은 정말 감탄이 연거푸 나올 정도로 최고였습니다. 이처럼 기교를 이용하지 않고 진행을 했으면, 상당히 무거운 영화로 다가오지 않았을까 하네요. 대니 보일의 연출이 물 만난 고기처럼 보이더군요.
by 배트맨 | 2009/04/24 16:54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6) | 핑백(1) | 덧글(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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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ked at 배트맨이 들려주는 이야기. 레.. at 2009/04/24 20:51

... 완전히 필을 받았네요. :)보너스 컷이 조금 생뚱맞기는 했었습니다. 우리나라와 할리우드 영화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라서요.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 리뷰 새창으로 가기 ... more

Commented by 신어지 at 2009/04/24 18:12
제작자들과 대니 보일 감독의 진심을 저 보다는 배트맨님께서 잘 받아주신 것 같습니다. "두 형제를 통해서 본 삶의 가치관과 사랑의 정의"라는 메시지가 원작에서는 잘 드러났을런지 몰라도 영화를 통해서는 그리 효과적으로 부각되지는 못했다는 것이 제 감상이거든요. 영화 초반의 화려한 비주얼도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치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지고.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작품을 직접 접하기 전에 가졌던 선입관과 편견, 기대감 등에서 벗어나질 못했던 것 같습니다. ㅠ.ㅠ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4 18:25
신어지님께서 제 리뷰를 깊이 이해해주시며 받아주시니 감사드릴 뿐입니다. 잠깐 지인분들 리뷰를 돌아다니며 읽어봤는데, 신어지님과 같은 의견이 많으시더군요. 저는 이 작품이 괜찮았지만요. 개인적으로 최우수 작품상을 주기에는 좀 그런 것 같고, 감독상은 후보로 올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

그런데 엔니오 모리꼬네는 평생을 아카데미에서 외면받다가 얼마 전에 공로상을 겨우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이 음악상 두개 부문을 싹쓸이 한 것은 좀 받아들이기 힘들더군요. 아카데미 회원들이 싹 바뀐 것인지.. -_-a

놓쳐버린 영화들 대부분은 내려갔고, 가슴 한편이 막막해져 옵니다. <벤자민 버튼의..>를 볼 방법이 없네요. T.T
Commented by 소시민 at 2009/04/24 18:39
이번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서 저는 '슬럼독 밀

리어네어', '프로스트 VS 닉슨', '벤자민 버튼의...' 이 세 작품을

관람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중에선 '슬럼독'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사실 저도 신어지님의 말씀처럼 '두 형제의 삶의 가치

관의 차이'가 그리 효과적으로 전달됬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지만

뛰어난 편집과 비주얼이 이를 상쇄시키면서 황홀한 이미지를 만

들어낸게 대단하다고 느껴졌습니다. 음악도 정말 좋더군요...

언제 한번 원작도 찾아 읽어보고 싶습니다. 배트맨님도 이 영화

에 좋은 인상을 가지신것 같아 기쁩니다. ^^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4 18:46
저는 놓친 영화들 대부분이 극장가에서 내려갔음을 탄식하며 울고 있는 중입니다. 좀 멀리 가더라도 볼 수만 있으면 관람을 하려고 했는데요. T.T

이 작품의 음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였고요. 평생을 외면받아온 엔니오 모리꼬네를 볼때, 아카데미 회원들의 변덕(?)은 솔직히 이해가 안가더군요. 그동안 비할리우드권 음악가들의 손을 들어준 적도 있었지만, 앞으로는 비할리우드권 영화/음악인들의 재능을 편견없이 그들이 받아들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이 작품 좋았습니다. 대니 보일 이 양반 결국 해내는구나 하는 기쁨이 컸습니다. ^^;
Commented by 다이나모 at 2009/04/24 23:23
28개월 후도 감독을 맡는다고 하니, 주인공들 또 얼마나 뜀박질을 해댈까 기대됩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4 23:45
정말 이 작품에서 꼬마들이 끊임없이 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트레인 스포팅>이 많이 생각났었습니다. 대니 보일 감독 다시 포스를 찾은 것 같으니 기대를 좀 해봐야 할 것 같네요. ^^*

트랙백 콤보세트까지 잘 받았습니다. 고맙습니다.
Commented by 아쉬타카 at 2009/04/24 23:56
모든 영화에 잘 공감하는 저도, 이번 경우는 쉽게 빠져들지 못했던 것 같아요 ^^;;

그러나저러나 오랜만에 배트맨님의 리뷰를 보니 반갑네요 ~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5 00:07
영화라는 것이 워낙 기호를 타는 취미이고, 또 개인마다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니까 아쉬타카님의 말씀도 충분히 존중합니다. ^^*

다시 반갑게 리뷰를 맞아주시고, 댓글과 트랙백 콤보세트를 보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상적이라면 <노잉>을 봤어야 했는데, 일단은 아직 걸려있는 작품들부터 관람해보려고 합니다. 대부분은 내려갔지만요. T.T
Commented by 포케 at 2009/04/25 05:45
다 좋은데 몇 주 전에 MBC W에서 슬럼독 밀리어네어에 출연했던 인도 빈민층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감독 측은 영화를 촬영하면서 "이 영화가 잘 되면 너희들에게 충분한 수익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해놓고 영화를 찍었지만 미국으로 떠나더니 감감 무소식이라더군요.
쥐어진 것은 푼 돈 조금.
영화를 찍느라 가족들이 생업을 내팽개치고 아이 뒷바라지 한다고 따라다닌 시간에 대한 보상에 턱없는 수입으로 생활은 더 어려워졌다고 합니다.
벌어들인 수익에서 조금이라도 배분해 준다면 그 아이들과 아이들의 가족들이 냄새나는 빈민촌의 천막생활을 벗어날 수 있었을텐데요.
그 쪽 동네 사람들은 영화 감독에게 심한 분노와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능력이 어떻든 영화도 별로 와 닿지 않을 것 같아요.
정말 실망스러운 감독입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5 16:13
댓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소식이군요. 저는 포케님 댓글 읽으며 처음 알았습니다.

이 작품 영화에서 보여지는 것에 비해서,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저예산으로 제작되었더군요. 제작비가 불과 1천5백만$ 밖에 안들었으니까요. 이로 미루어 짐작컨데 인도인들에게는 정말로 촬영하면서 푼돈 정도만 쥐어줬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작비가 인도 올로케로 진행되었는데, 이렇게 적게 들수가 없었을 거예요.

반면 흥행을 보면 대박을 쳤습니다. 월드와이드 스코어가 무려 3억2천만$을 기록하고 있네요. R등급의 영화인데도 말이죠.

배급은 폭스가 담당하고 있지만, 제작사는 처음 들어보는 마이너 3개사가 참여했습니다. 대니 보일이 제작에 관여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촬영하면서 "성공을 하면 충분한 수익을 보장해주겠다"라고 약속까지 하면서 영화를 만들었으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좋아하는 감독인데 참 안타깝고 저 또한 분노가 생기네요. 정말 왜들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와 명예를 모두 움켜쥐고 있는 양반들이 말입니다.

<놈.놈.놈>도 스탭들에 대한 페이를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얼음집에서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요. 영화판이 참 지저분한 동네인가 봅니다. (참고로 대니 보일은 영국인입니다.)
Commented by 혈류 at 2009/04/25 22:14
복귀하셨네요 ㅎ
전... 한동안 이글루스 안들어왔는데;;;;
오랜만에 들어와봤는데 ㅎㅎ 반가워요 ㅎ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9/04/26 00:14
네 며칠 전에 얼음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두달 남짓 떠나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적응이 되는 것 같네요. ^^;

혈류님께서는 요즘 블로깅을 통 안하시는 것 같으시던데요. 저 혈류님과 영화 트랙백과 댓글 콤보세트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서 돌아오세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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