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즈 루어만 감독은 20세기폭스와 달콤한 밀회를 즐겨왔었습니다. 이번 신작을 포함해서 그가 연출한 최근의 세작품을 모두 폭스가 제작하고 배급해왔으니까요. 월드와이드 스코어를 살펴보면 1996년작 <로미오와 줄리엣>이 1억4천만$를 벌어들였고, 2001년작 <물랑루즈>는 무려 1억7천만$를 벌어들이며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습니다. 이와같이 바즈 루어만 감독의 작품이 연거푸 흥행에서 성공을 하자, 그에 대한 폭스의 신뢰가 깊어졌었나 봅니다.
이번 신작은 올 한해 폭스가 개봉시킨 작품중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인 1억3천만$를 투입했더군요. 크게 배팅하고 그만큼 더 크게 거둬들이고 싶었던 것이였겠죠. 하지만 이 작품으로 바즈 루어만의 성공 시대는 일단 멈추게 될 것 같습니다. 북미의 흥행은 물 건너 간지 오래이고, 기댈 곳은 이제 해외 시장 밖에 없는데 제작비 회수나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더군다나 올 한해 내내 부진을 겪고있던 폭스이기 때문에, 바즈 루어만의 이번 참패는 그 어느 때보다도 뼈아플 겁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격정적으로 펼쳐지는 로맨스 작품으로 포장되어 있었지만, 이 영화에서 2차 세계대전이라는 배경은 작은 도구적인 역활로만 그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 부분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내러티브를 이끌어나가는 주체가 로맨스가 아니라는 점은 예상 밖이였네요.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흥행에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장르로 보았을때 전쟁이라는 배경이 크게 부각되기를 바랬을 관객은 거의 없었을테고, 이러한 생각은 바즈 루어만 감독의 생각과도 일치합니다. 하지만 휴 잭맨과 니콜 키드먼의 격정적인 사랑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은 분명히 많았을 것 같은데, 이러한 구성에서는 감독의 의중이 크게 달랐던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전달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잃어버린 세대'였으니까요. 전쟁 뿐만이 아니라 휴 잭맨과 니콜 키드만까지 모두 도구적인 역활로만 제한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업 영화에서 더군다나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투입한 작품에서 대중들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겠죠. 전달하고 싶은 속내는 '잃어버린 세대'였지만, 두 남여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덧칠하다 보니까 상영 시간은 165분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전쟁의 혼란속에서 펼쳐지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에만 집중을 해서, 포장된 그대로 영화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관객들에게 안겨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드네요. 상업 영화에 충실한 내러티브를 선택했으면 한마리의 토끼라도 확실히 잡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대중들은 물론이고 아카데미 같은 영화제 또한 염두에 두고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 영광스러운 트로피를 움켜쥐기에는 플롯의 구성이 단순하고 산만합니다. 처음부터 한가지 대상만을 목적으로 해서 제작을 했으면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가득 느껴지는 영화입니다. 오락성과 작품성 사이의 경계선에서 걸터 앉아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와같이 영화적인 포지션이 그 어느 쪽에도 속해있지 않은 작품이기는 하지만 바즈 루어만 감독의 재능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기도 합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를 향해서 밧줄을 던지며 다가서는 휴 잭맨과, 미지의 오지를 향해서 달려나가는 원주민 아이를 교차 편집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백미입니다. 그 밖에 풍차가 돌아가는 순간 잡아내는 앵글과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향은 당시 '잃어버린 세대'들이 느껴야만 했던 내적인 두려움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자막으로 '잃어버린 세대'에 만행을 저지른 시간들에 대해서 호주 정부가 올해에 공식적으로 사과했다고 나오더군요. 시드니 올림픽때 최종 성화 주자가 원주민 출신 선수였던 것을 기억해보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해서 호주의 백인들이 얼마나 벗어나고 싶어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게된, 호주 출신의 바즈 루어만 감독도 어쩌면 이러한 시간들을 자신의 영화에서 한번쯤은 그려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말로 과거를 성찰해보고 싶었다면 대중적인 요소들은 과감하게 생략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그러한 작품에는 사실 이렇게 많은 제작비가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