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저를 데리고 동네에 있는 동시 상영관(1)으로 영화를 보러 가셨습니다. 비록 개봉관은 아니였지만 모처럼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기대감과 함께 내심 <람보 2>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더군요. 그 날 관람한 또 다른 한 작품도 무척 재미있게 봤었던 기억이 떠오르는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로 출연한 007 시리즈중 한편이였습니다. 희미해진 추억을 더듬어 보면 <문레이커>였었던 것 같네요. 본드걸과의 배드씬에서는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조용히 꼴깍 삼켰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007 시리즈에 재미를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첨단 장비로 무장한 자동차를 몰며 좌충우돌 맹활약 하는 제임스 본드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낄 수가 없더군요. 스토리는 매번 진부했고 유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계속 제작이 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로요.
아버지와 함께 한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에 등을 돌려버린 제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상영관에서 제임스 본드를 만난 것은 <카지노 로얄>때였습니다. 시대에 걸맞게 007 시리즈도 변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며 많은 것을 바꿔버렸다는 이야기에 상영관으로 향한 것이죠. 실로 오랜만에 어린 시절의 희열을 영화속에서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니였나 봅니다. 평단과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으며 역대 007 시리즈중 최고의 스코어를 기록했으니까요.
이번 <퀀텀 오브 솔러스>는 그래서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독이 마크 포스터로 교체되었지만 그의 전작들을 대단히 인상적으로 관람했기 때문에 불만도 없었습니다. 드라마를 상당히 탄탄하게 뽑아내는 것에 재능을 보여준 감독이기 때문에 <카지노 로얄>에서 보여준 진보적인 모습에 더해 영화적인 밸런스를 잘 맞춰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퀀텀 오브 솔러스>를 보고나니 <카지노 로얄>은 007 시리즈의 최고 수작으로 기록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퀀텀 오브 솔러스>는 전작이 보여준 진보적인 스타일에 교묘하게 클래식한 예전의 색깔들을 칠해놓았더군요. 문제는 전자보다 후자의 색깔이 너무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진보를 가장한 보수적인 연출관이 다시 보이더군요. <카지노 로얄>과 같은 완전히 진보적인 스타일의 작품은 역시 007 시리즈에서는 일회성 돌연변이였던 것이였을까요.
각본, 촬영 등 주요 스탭들이 대부분 전작에 이어서 이번 작품에도 참여를 했는데, 결국 옛날 제임스 본드에게 향수를 갖고 있다는 마크 포스터의 작품관이 상당수 반영이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직히 영화적인 밸런스를 맞추지 못한채 106분동안 시종일관 때려부수기만 하는 깡통 팝콘 영화로 뽑아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연출을 마크 포스터가 담당했기 때문에 기대감이 고스란히 배신감으로 바뀌더군요. 이 작품은 액션씬에서만 진보적인 스타일을 보여주는 <카지노 로얄> 이전 시절의 007 작품으로 회귀한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안보셨다면 읽지 마시길..

전작이 큰 호응과 반응을 얻은 가장 큰 이유는 지금껏 007 시리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섬세하게 제임스 본드의 내면을 보여주었고 이런 것이 화려한 액션씬과 맞물리면서 대단한 매력을 안겨주었는데, 이번 작품에는 캐릭터에 대한 묘사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더군요. 물론 점점 냉혈한이 되어가는 특수 요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라서 전작과 같은 제임스 본드의 내면을 들춰낼 수는 없었겠지만, 마크 포스터라면 이번 작품에서 제임스 본드의 캐릭터를 섬세하게 완성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죽어가는 매티스를 기꺼이 안아주며 배려를 해준 후, 죽은 시체는 쓰레기 더미속으로 던져버리는 시퀀스가 참 마음에 들었는데, 이런 내면을 성찰하는 시퀀스가 전작과는 달리 거의 보이지 않고 2억2천만$짜리 액션에만 집중을 하니 참 당혹스럽더군요. 마크 포스터를 감독으로 캐스팅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역시 제작사의 의지도 진보적인 제임스 본드를 계속 보여주려고 한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깡통 팝콘 영화로 제작비를 다 써버리는 옛날의 007이 아닌, 섬세한 드라마를 액션속에서 뽑아내는 그런 작품을요.

분명히 드라마를 탄탄하게 이끌어낼 수 있는 재능의 감독을 캐스팅 했음에도, 영화가 액션에만 치우치는 과거의 작품들로 회귀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전작의 스코어를 뛰어넘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존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 신물이 나버린 저같은 관객들은 어쩌면 상영관을 찾을 일이 앞으로 몇 편 남아있지 않을지도 모르겠네요.
제작사와 감독은 <카지노 로얄>의 성공이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평단과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가 제작비에서 비롯되었던가요. 더럽혀지고 피 묻은 슈트와 상처투성이의 제임스 본드는 전작에 이어서 그대로 살려놓았지만, 드라마적인 요소와 캐릭터를 묘사하는 것은 삭제해버린 <퀀텀 오브 솔러스>를 보니 향후 007 시리즈의 기획 맥락이 대략 예상됩니다. 안타깝습니다.

(1) 옛날에는 단관 극장만이 있었는데 요즘처럼 와이드 릴리즈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영화 한편이 단관 개봉관 한곳에 걸리면 몇달씩 상영하는 일이 비일비재 했습니다. 몇달 후 단관 극장에서 상영 프로그램이 바뀌면, 그 필름이 그제서야 동시 상영관으로 배급이 되었죠.
동시 상영관의 티켓값은 당연히 단관 개봉관보다 저렴했고, 각기 다른 영화를 두편씩 상영했기 때문에 입장을 하면 영화를 두편이나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람보 2>와 <어우동>이 동시 상영되는 거죠. 동시 상영관 안에서는 좌석에 앉은채로 담배를 필 수도 있었던 시절이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