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얼음집 안에 서툴게 집어넣은 영화들과 상영관들. (2006.10.23~)
by 배트맨

바디 오브 라이즈 - 디지털 (Body of Lies)
냉전 시대가 종식된 후 할리우드에서 주적 캐릭터로 즐겨 사용해오던 시대와 공간이 소멸되었고, 그 대안을 중동 지역의 극우 이슬람 세력에게서 찾는 것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미국 본토에서 충격과 공포를 경험한 일도 있으니,
오히려 냉전 시대때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재로 부상했습니다.  

주적이 같은 무리로 설정되어서 사투를 벌인 '제이슨 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스파이 스릴러물은 북미 외 지역에서 악역 캐릭터를 찾아내고 만들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때 이 영화는 특별한 작품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이들에게 장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외에는요.

영화라는 것이 대중들이 인지하고 있는 소재를 선호하는 동시에, 또한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컨텐츠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을때 이 작품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맞습니다. 리들리 스콧에게는 완성도를 기대했을테고, 각본을 맡은 윌리엄 모나한에게는 오락성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두 배우에게는 완벽한 연기를 바랐을테고요. 

리들리 스콧과 배우들은 관객으로서 기대한 것에 충분히 부응을 해줍니다. 하지만 128분을 채워나가는 플롯에는 허술한 구석이 보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이 워낙 출중했던 탓에 이러한 부분이 어느 정도는 가려질 수 있었겠지만, 구성상의 태생적인 한계가 이 작품을 범작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읽지 마시길..


잘 진행이 되던 밀도높은 연출과 긴장감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현지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관람을 하면서 리들리 스콧이 이럴 감독이 아닌데, 극의 흐름이 느슨해짐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상대로 이 캐릭터가 종반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는데, 개연성 부분에서 썩 매끄럽게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같은 팀의 조직원들과 부하들이 죽어가지만 조국의 대의를 위해서 크게 개의치않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던 최고의 요원이, 이제 막 사랑이 싹터가는 여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고 한다는 점이 와닿지를 않았습니다. 흔하디 흔한 공식의 로맨스를 스릴러 틀 안에 넣은 것 자체가 진부해보였으며 그 결과물에서는 캐릭터의 일관성과 함께 개연성까지 모두 사라져버리게 만듭니다. 최고의 감독과 배우들의 격에 맞게 맞춰나갈 수 있는 플롯이였으면 참 좋았을텐데, 윌리엄 모나한의 각본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진부함과 개연성의 실종이 출발된 셈인 것 같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이 작품의 소재로 보았을때 정치적인 색깔과 연계해서 해석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누구에게나 모든 영화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와같은 재해석을 옳다 또는 그르다라고 구분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상품이 대부분은 대중들의 기호와 니즈를 파악한 후 기획이 된다는 점에서 볼때, 미국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러셀 크로우는 미국 정부를 대변하는 캐릭터로 볼 수 밖에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과 미션 지시를 내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는 모습은, 미국민들의 안전과 평화는 그렇게 강조하면서 중동 지역에서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습니다. 러셀 크로우가 지시나 통화를 할때의 묘사를 보면 자상하게 자녀를 돌본다던가,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 등이 유독 많이 연출되던데 미국 정부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타국의 이해는 안중에도 없으며, 매우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엔딩을 보면 이 작품의 색깔을 정의하기가 매우 모호해집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이제는 민간인이라며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중동 지역에서 그들이 벌이고 있는 수많은 피와 추악한 행동을 폭력이나 범죄의 범위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된 수많은 미국인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 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그뿐인 것이지요. 자유롭게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사랑이 싹튼 여성을 지켜보듯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꿈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곳에 있겠지만 끊임없이 주어지게 될 면죄부는 러셀 크로우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양측 모두를 스스로 구원하는 자기 안식입니다. 끊임없이 추악한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미국 공화당의 안식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를 즐기려면 스파이 스릴러물이 안겨주는 요소들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서두에 밝혔듯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상업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플롯의 허술함을 덮어가려 하는 노감독의 탁월한 재능과 배우들의 열연은 장르적인 묘미를 상당수 맛보게 해줍니다. 

공격용 헬리곱터로부터 공격을 받을때의 앵글에서는 탄성이 나왔는데 이와같은 비주얼은 단지 이 장인 감독이 펼쳐보이는 여러 옵션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장르를 완벽히 이해한 후 영화를 지배하는 힘은 그가 왜 장인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이 노감독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by 배트맨 | 2008/10/25 15:24 | 영화를 보고온 후 | 트랙백(4) | 덧글(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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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신어지 at 2008/10/25 18:00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식상한 이미지와 더불어 지적하신 현지 여성과의 로맨스(물론 중요한 플롯으로 활용되는 부분이기는 합니다만)가 영화의 긴장감을 엄청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배우가 워낙 미인이시라 보는 동안은 그리 싫지만은 않았습니다만. ㅎㅎ 민간인이 된 CIA 현장 요원의 미래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리들리 스콧 감독이 취한 마지막 양심(?)처럼 보이더군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5 21:34
뜬금없이 여성 캐릭터가 나오면서 잘 나가던 스릴러가 순식간에 망가지는 것 같더라고요. 리들리 스콧 이 양반이 이럴 감독이 아닌데 하는 생각에,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결국 중요한 플롯으로 활용은 되지만, 윌리엄 모나한의 각본에 실망이 드는 부분이기도 했고요. 돈을 벌어들여야 한다는 제작사의 압박이 너무 컸던 것이였을까요? 한편으로는 이것이 윌리엄 모나한의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은 의심해본 적이 없지만, 이제는 캐릭터의 폭을 좀 넓혀야 할 시점이 온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연기력과는 상관없이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처럼 배우에게 무서운 것도 없을테니까요.

리들리 스콧은 신어지님 리뷰대로 상당히 유연한 사고를 가진 연출가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미국에 손만 들어주는 영국인이였다면 제가 이렇게까지 좋아하지는 않았을거예요. ^^*
Commented by 아쉬타카 at 2008/10/26 01:16
전 리들리 스콧의 정치관에 대해서 <블랙 호크 다운>에서는 코웃음을 칠정도로 매우 실망했다가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또 굉장히 만족하기도 했었는데, 이번 영화는 이도저도 아닌 미지근한 정도였던 것 같아요.
의도를 보니 정치색을 지워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정치적인 사안이 관련된 영화에서는 정치색을 확실히 해주던가 아니면 아예 동떨어진 개인에 얘기를 보여주던가 하는 편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이번 작품은 감독이나 배우들의 네임벨류에 비해 아쉬움이 많았던 영화였던것 같아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6 01:48
<블랙 호크 다운>에 대한 아쉬타카님의 말씀도 존중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최첨단 기술의 지원을 맹신하며 오만한 - 장비 착용조차 안하고 작전에 참여하는 - 미군들이 소말리아 민병대에 된통 당하는 영화로 해석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것 없이 재미있게 봤었던 영화였어요. 물론 일부 캐릭터의 해석은 보는 관객에 따라서 문제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상업 영화의 틀 안에서 묘사되는 모습으로 받아들였고요.

이번 작품의 색깔이 모호한 것은 결국 노골적으로 돈을 벌어보자고 기획한 작품이였기 때문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7천만$나 투입한 영화에서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은, 그것이 어느 쪽이든간에 그들도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고요.

이런 것을 다 떠나서 최근의 리들리 스콧 감독 작품중에서는 썩 재미있거나 만족스러웠던 영화는 아니였습니다. -_-
Commented by ArborDay at 2008/10/26 12:39
정치적으로는 깊게 들어가지 않았더군요. 뭐, 그런 식의 접근을 딱히 싫어하는 편은 아닙니다. 다만 의견이 밍숭맹숭하니 재미가 없더군요.
오히려 흥미로웠던 부분은 미국의 노동력 사용방식에 대한 비웃음이라고 해야할까. 키워서 써먹는 것은 항상 중요한 법입니다. 물론 이 영화에서 인력양성이란 총체적으로 좋은 것은 아니지만.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6 16:09
돈을 벌자고 작정을 하고 만든 영화인 동시에 7천만$나 투입한 작품이라서, 정치적인 색깔을 대놓고 드러내는 것은 제작사 입장에서도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색깔이 어느 쪽이든간에요. (캐스팅에도 문제가 있었을 것 같고요.)

저도 이 작품은 리들리 스콧의 영화치고는 꽤 심심했습니다. 최근 그의 작품들중에서는 가장 평범했었던 것 같아요.
Commented by 스테판 at 2008/10/26 21:54
역시나 빠지지 않은 로맨스란..-_-... 가지 않아야 하는 길을 가는 걸 볼때의 그 아픔이란ㅜ_ㅠ..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6 22:09
저도 갑자기 그런 시퀀스가 나오면서 '윌리엄 모나한 이 양반 뜨더니 영화를 산으로 가게하네'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들리 스콧이 연출을 맡고, 쟁쟁한 배우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어떻게 그런 진부한 스토리를 쓸 생각을 한건지.. 상영관을 나서는데 속이 아려왔습니다. T.T
Commented by bada at 2008/10/27 11:13
최근 상영작 중엔 이 영화 정도가 괜찮은건가요? 전반적으로 평은 좋은 것 같지 않은데...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7 13:14
네. 최근 상영작중에서는 이 작품 정도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 다만 이번 작품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치고는 좀 심심하네요. 연출의 문제라기 보다는, 각본의 문제로 보였습니다. 배우들의 연기와 연출 자체는 좋았거든요.
Commented by Uglycat at 2008/10/27 13:55
뜬금없는 '썸씽'에 당황하기도 했고,
결말에 멍해지기도 했고...
아무튼 알맹이가 부실했어요...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7 15:30
저도 썸싱이 나올때는 참 당혹스러웠습니다. 리들리 스콧이 이런 우스꽝스러운 무리수를 둘 감독이 아닌데, 역시 예상대로 썸싱이 등장했던 이유가 있었더군요. 각본을 담당한 윌리엄 모나한이 급미워졌었습니다. -_-a

연출 자체는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마음에 들었는데, 플롯이 이들의 퀄리티를 전혀 따라가지 못한 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bluenlive at 2008/10/28 19:44
러브러브 모드를 제외하면 그다지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 생각합니다.
블럭버스터로서의 모습도 유지하면서 전체적인 구성도 적당했다고 봅니다.

정치적인 모습도 가능한 배제하려고 했던 흔적도 역력했고 말이죠.

전 오히려 크로 형님의 어색한 길반장 패러디가 더 몰입을 방해했던 것 같습니다.
Commented by 배트맨 at 2008/10/28 20:17
bluenlive님의 말씀도 존중합니다. 저도 입장료가 아깝다거나 후회가 들게 한 작품은 아니였습니다. 다만 리들리 스콧의 근래 작품중에서는 가장 범작이 아니였을까 싶네요.

러브러브 모드가 무척 생뚱맞았지만, 문제는 그와같은 진부한 설정이 결국 종반부에서 억지스러운 절정을 이룬다는거죠. 디카프리오가 희생을 하려고 하는 모습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더군요.
연출보다는 각본의 문제였다고 생각을 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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