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 시대가 종식된 후 할리우드에서 주적 캐릭터로 즐겨 사용해오던 시대와 공간이 소멸되었고, 그 대안을 중동 지역의 극우 이슬람 세력에게서 찾는 것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일도 아닙니다. 미국 본토에서 충격과 공포를 경험한 일도 있으니,오히려 냉전 시대때보다도 더욱 효과적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소재로 부상했습니다.
주적이 같은 무리로 설정되어서 사투를 벌인 '제이슨 본'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스파이 스릴러물은 북미 외 지역에서 악역 캐릭터를 찾아내고 만들어냅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때 이 영화는 특별한 작품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이들에게 장인으로 인정받고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 외에는요.
영화라는 것이 대중들이 인지하고 있는 소재를 선호하는 동시에, 또한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컨텐츠로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을때 이 작품은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맞습니다. 리들리 스콧에게는 완성도를 기대했을테고, 각본을 맡은 윌리엄 모나한에게는 오락성을 요구했을 겁니다. 이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두 배우에게는 완벽한 연기를 바랐을테고요.
리들리 스콧과 배우들은 관객으로서 기대한 것에 충분히 부응을 해줍니다. 하지만 128분을 채워나가는 플롯에는 허술한 구석이 보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연출이 워낙 출중했던 탓에 이러한 부분이 어느 정도는 가려질 수 있었겠지만, 구성상의 태생적인 한계가 이 작품을 범작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셨다면 읽지 마시길..

잘 진행이 되던 밀도높은 연출과 긴장감이 깨지기 시작한 것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현지 여성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관람을 하면서 리들리 스콧이 이럴 감독이 아닌데, 극의 흐름이 느슨해짐에도 불구하고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상대로 이 캐릭터가 종반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키는데, 개연성 부분에서 썩 매끄럽게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같은 팀의 조직원들과 부하들이 죽어가지만 조국의 대의를 위해서 크게 개의치않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여주던 최고의 요원이, 이제 막 사랑이 싹터가는 여성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려고 한다는 점이 와닿지를 않았습니다. 흔하디 흔한 공식의 로맨스를 스릴러 틀 안에 넣은 것 자체가 진부해보였으며 그 결과물에서는 캐릭터의 일관성과 함께 개연성까지 모두 사라져버리게 만듭니다. 최고의 감독과 배우들의 격에 맞게 맞춰나갈 수 있는 플롯이였으면 참 좋았을텐데, 윌리엄 모나한의 각본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진부함과 개연성의 실종이 출발된 셈인 것 같아서 무척 아쉬웠습니다.

이 작품의 소재로 보았을때 정치적인 색깔과 연계해서 해석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느 누구에게나 모든 영화적인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와같은 재해석을 옳다 또는 그르다라고 구분짓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영화라는 상품이 대부분은 대중들의 기호와 니즈를 파악한 후 기획이 된다는 점에서 볼때, 미국인들의 생각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러셀 크로우는 미국 정부를 대변하는 캐릭터로 볼 수 밖에 없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과 미션 지시를 내리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가족들을 챙기는 모습은, 미국민들의 안전과 평화는 그렇게 강조하면서 중동 지역에서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군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습니다. 러셀 크로우가 지시나 통화를 할때의 묘사를 보면 자상하게 자녀를 돌본다던가, 이웃에게 친절을 베푸는 모습 등이 유독 많이 연출되던데 미국 정부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타국의 이해는 안중에도 없으며, 매우 오만한 성격으로 묘사되는 것을 보더라도 말이죠.
하지만 엔딩을 보면 이 작품의 색깔을 정의하기가 매우 모호해집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 수많은 피를 흘리게 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이제는 민간인이라며 면죄부를 주기 때문입니다. 중동 지역에서 그들이 벌이고 있는 수많은 피와 추악한 행동을 폭력이나 범죄의 범위라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의 손과 발이 된 수많은 미국인들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낸 후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면 그뿐인 것이지요. 자유롭게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사랑이 싹튼 여성을 지켜보듯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꿈이 그들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그들을 대신하여 그곳에 있겠지만 끊임없이 주어지게 될 면죄부는 러셀 크로우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양측 모두를 스스로 구원하는 자기 안식입니다. 끊임없이 추악한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미국 공화당의 안식인 셈이지요.

하지만 이 영화를 즐기려면 스파이 스릴러물이 안겨주는 요소들을 만끽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 각도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작품이기도 하지만, 서두에 밝혔듯이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상업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플롯의 허술함을 덮어가려 하는 노감독의 탁월한 재능과 배우들의 열연은 장르적인 묘미를 상당수 맛보게 해줍니다.
공격용 헬리곱터로부터 공격을 받을때의 앵글에서는 탄성이 나왔는데 이와같은 비주얼은 단지 이 장인 감독이 펼쳐보이는 여러 옵션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장르를 완벽히 이해한 후 영화를 지배하는 힘은 그가 왜 장인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보여줍니다. 저는 이 노감독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싶습니다. 시간이 많이 남지는 않았지만 좀 더 많은 그의 작품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해봅니다.










